사찰은 산속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높은 곳에 올라야 수행의 진심이 닿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해동용궁사는 나의 이런 고정관념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산이 아닌 바다, 숲이 아닌 절벽. 이 사찰은 그 어떤 경계도 넘어서 있었다.
부산 기장에서 만난 ‘파도 위의 사찰’
해동용궁사를 처음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여행 블로그에 우뚝 솟은 석불 사진 한 장이 있었다. 파도 위 절벽에 서 있는 관음상. 그 사진 한 장이 너무도 인상 깊어, 나는 곧바로 부산행 기차표를 끊었다. KTX를 타고 2시간 반, 그리고 기장에서 버스를 타고 30여 분을 달려 도착한 그곳. 용궁사는 정말 사진 그대로, 아니 그 이상이었다.
사찰 입구는 소박했다. 하지만 안으로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세상의 풍경은 급변한다. 경내에 다다르는 동안 수많은 불상들과 돌탑, 염원을 담은 문구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의 발자국이 닳아 생긴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그 아래로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그 끝에 해수관음대불이 당당히 서 있었다.
계단 아래 펼쳐진 수평선, 그리고 불심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갈수록, 파도 소리가 점점 또렷하게 들렸다. 종소리도 아니고, 북소리도 아닌, 자연의 경전. 해동용궁사는 바다를 배경으로 불심을 담고 있었다. 나는 마치 바닷가에서 기도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찰 중심부에 들어서자 ‘바다가 보이는 법당’이 있었다. 안에서 참배를 올리는 사람들의 모습 너머, 창문 틈으로 동해 바다가 보였다. 불경을 암송하는 스님의 목소리와 파도 소리가 묘하게 겹쳐졌다. 그 순간, 나는 사찰이 주는 고요함과 바다가 주는 광활함이 같은 선상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해수관음대불 앞에 섰다. 그 크기와 위치, 무엇보다도 바다를 바라보는 부처의 시선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눈빛은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한없이 멀고 조용한 수평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무엇을 바라보았는지도 모르고, 왜 눈물이 맺혔는지도 모르고, 그저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소원을 담은 계단, 그리고 소란 너머의 평화
해동용궁사는 관광객이 많은 편이다. 특히 주말이면 많은 이들이 소원을 빌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나도 돌계단에 있는 십이지신상들을 지나며 조용히 손을 모았다. 사람들 사이사이로 어린아이들이 뛰고, 노부부가 손을 잡고 걸으며 웃고 있었다. 그 풍경마저 따뜻했다. 불교가 주는 감동은 때로 이렇게 일상적인 장면 속에서 피어난다.
나는 사찰 한쪽에 놓인 나무 벤치에 앉아 바다를 오래 바라보았다. 날이 좋았고, 하늘은 투명했다. 파도는 그날따라 다소 거칠었지만, 그것마저 리듬처럼 느껴졌다. 주변의 소란은 자연스럽게 배경음처럼 흐르고, 나는 내 마음의 고요함과 마주하게 되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주머니 속 작은 메모지에 소원을 적어 돌탑 사이에 끼워두었다. 특별한 문장은 아니었다. “그저 평화롭게 살고 싶습니다.” 짧은 그 한 문장을 쓰는데도 마음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되돌아 나오는 길, 다시 찾아가고 싶은 사찰
돌아오는 길, 사찰 입구에 있는 작은 찻집에 들렀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마시는 따뜻한 유자차 한 잔은 그날의 여운을 천천히 내려주었다. 해동용궁사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었다. 그곳은 마음을 다시 채우고, 소란을 정리하고,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공간이었다.
많은 사찰을 가봤지만, 이렇게 바다와 절이 자연스럽게 하나 된 곳은 처음이었다. 나는 마음속에 하나의 명소를 새겼다. 그리고 언제든 삶이 지칠 때, 다시 이곳을 찾을 것이라 다짐했다. 해동용궁사는 그런 곳이다. 한 번은 우연히, 두 번은 의지로, 세 번은 믿음으로 찾아가게 되는 절.
결론: 파도 소리와 함께 머문 마음
해동용궁사에서의 시간은 짧았지만 오래 남았다. 그곳에서 내가 한 일은 걷고, 보고, 앉고, 잠시 기도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단순한 일들이 내 마음을 얼마나 정리해주는지, 얼마나 차분하게 만들어주는지 깨달았다.
혹시 지금 당신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면, 사람들이 많이 가는 유명 관광지가 아닌, 해동용궁사로 향하길 권한다. 바다를 바라보는 부처님의 침묵 속에서, 당신의 마음도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 당신도 내게 그랬던 것처럼, 그 사찰을 ‘다시 오고 싶은 곳’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