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여행은 더 이상 ‘종교’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마음이 지치고 복잡해질 때, 도시를 떠나 산 속 고요한 절을 찾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이유와 방식으로 그 공간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번 글은 이름조차 생소한, 그러나 결코 잊을 수 없는 세 곳의 '숨은 사찰'을 찾아 떠났던 나의 이야기입니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거나, 가파른 숲길을 올라야만 만날 수 있는 그곳. 산이 품고, 세월이 숨긴 고요한 사찰들을 소개합니다.
전남 구례 화엄사 깊숙이 숨은 수행 공간, 각황암
지리산 자락에 안긴 화엄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름입니다. 그러나 화엄사 경내에서 더 깊숙이, 산을 올라가야만 만날 수 있는 작은 암자 ‘각황암’은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신비입니다.
나는 새벽 첫차를 타고 구례로 향했습니다. 정류장에서 택시를 타고 화엄사 입구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7시. 아직은 관광객도 없고, 사찰 문도 조용히 닫혀 있었지만, 나는 곧장 암자길로 향했습니다. 화엄사 본전에서 각황암까지는 약 40분가량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집니다. 숲길은 흙과 돌, 이끼 낀 계단이 뒤섞여 있었고, 주변에는 새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오르고 또 오르기를 반복하다 어느 순간 나무 사이로 바위 위에 조용히 자리한 암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곳이 각황암인가...’ 순간 숨이 멎을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 암자는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잊힌 사람들’ 혹은 ‘잊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처럼 느껴졌습니다.
각황암은 크지 않습니다. 아담한 법당 하나와 스님의 수행 공간, 그리고 좁은 마당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그 단출함이 오히려 마음을 단정히 만들어줍니다. 법당 문을 살짝 열고 향 하나를 올린 뒤, 암자 앞 바위에 앉았습니다. 아침 안개가 지리산 능선을 감싸고 있는 그 풍경은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말수가 적습니다. 어떤 이는 묵언 수행 중인 스님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물러나고, 어떤 이는 향 하나 피우고 돌아갑니다. 각황암은 그렇게, 사람의 소음보다 마음의 고요함을 더 오래 붙잡는 공간이었습니다.
강원도 오대산 적멸보궁, 수행자의 침묵이 머무는 공간
적멸보궁. 이름부터 남다른 이곳은 강원도 평창, 오대산 깊숙한 숲길 끝에 위치한 사찰입니다. 나는 평창역에서 택시를 타고 상원사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상원사 역시 오래된 사찰이지만, 오늘의 목적지는 그보다 더 깊은 곳. 상원사에서 2km 이상 산길을 걸어야 만나는 ‘적멸보궁’이었습니다.
산길은 잘 닦여 있었지만, 고요함이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중간중간 노송(老松)과 이름 모를 들꽃들이 시선을 끌었고, 가끔 만나는 순례자들과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며 걷다 보니 시간은 금세 흘렀습니다.
적멸보궁의 전각은 단정했습니다. 특별히 화려한 단청도, 금빛 불상도 없습니다. 법당엔 불상이 없는 대신, 그 자리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다는 믿음이 공간 전체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곳에서 나는 단 한마디 말도 하기 싫어졌습니다.
법당 앞 마당엔 큰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가지들이 잎을 흔들며 사찰 전체를 감싸 안는 듯한 소리를 냈고, 나는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을 듣고만 있었습니다. 누가 먼저 이곳에 와서, 이 정적을 부처님이라 불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 침묵이 불교의 가르침보다 더 강렬하게 마음에 박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돌아오는 길, 등 뒤에서 들려오는 풍경 소리는 마치 ‘다시 올 테냐’는 듯, 나를 붙잡는 듯했습니다. 나는 그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한 번 더 마음속으로 인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동 쌍계사에서 만난 불일암, 작지만 큰 울림
마지막 목적지는 경남 하동, 쌍계사입니다. 하동의 벚꽃길은 이미 전국적으로 유명하지만, 그 뒤편 깊은 산길에 위치한 ‘불일암(佛日庵)’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이 암자는 쌍계사에서 걸어서만 접근할 수 있으며, 차량 진입은 불가능합니다.
나는 쌍계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볍게 배낭을 멘 뒤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불일암까지의 길은 왕복 5km 정도. 꾸준한 오르막이 이어지지만, 길 자체는 위험하지 않습니다. 도중에 작은 개울을 따라 나무 다리를 건너고, 바람이 부는 오솔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주변이 조용해지며 세상이 달라집니다.
불일암에 도착한 건 오후 2시경이었습니다. 법당에는 스님 한 분이 조용히 염불을 외고 있었고, 나는 마당에 놓인 평상에 조심스럽게 앉았습니다. 바람이 적당했고, 햇살은 따뜻했습니다. 암자 앞에는 오래된 바위에 ‘불일암’이라 새겨진 글자가 뚜렷하게 남아 있었고, 그 위로 이끼가 얹힌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곳은 크지 않습니다. 방 두 칸짜리 법당과 작은 부엌, 창고가 전부입니다. 하지만 이 단촐한 공간이 주는 울림은 그 어떤 대형 사찰보다도 컸습니다. 아마도, 공간을 채우는 건 사람의 소리나 장식이 아니라, 그곳에 흐르는 ‘시간’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준비해온 작은 보온병에 담긴 녹차를 꺼내 마셨습니다. 차 맛은 특별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의 분위기가 차를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불일암은 그렇게, ‘작은 암자’지만 ‘큰 울림’을 주는 곳이었습니다.
결론
각황암, 적멸보궁, 불일암. 이 세 사찰은 화려하지 않지만 깊습니다. 멀리 있지 않지만 숨겨져 있고, 조용하지만 강렬한 울림을 남깁니다. 우리는 때때로 너무 시끄러운 곳에 익숙해져 조용한 것을 낯설어하지만, 이런 사찰들을 찾는 여행은 우리 안의 소음을 지우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다음 여행을 고민하고 있다면, 사람들로 붐비는 명소가 아닌, 마음과 마주하는 고요한 길로 발걸음을 옮겨보세요. 산 속 비밀 사찰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